<넬슨신 칼럼> 기차를 세운 CF 촬영
작성자최고관리자 등록일24-07-04 12:13 조회수60

글, 그림  넬슨 신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시작된 때를 1959년 경으로 기록한다. 그때의 한국 애니메이션은 영화로써 장편도 아니고 TV시리즈도 아닌 영화관 휴게시간을 이용해 상영되는 광고만화영화였다. 각 영화관은 일반적으로 하루에 약 5회 정도 본편을 상영했는데 그 중간 사이사이 휴게시간이 약 10분간씩 있었다. 이 공백시간을 이용해 여러 종류의 광고를 

했다. 이 당시에는 한국에 텔레비전 방송이 없었음으로 전파를 이용한 광고는 오직 라디오 방송뿐이었다. 제조를 주로하는 기업사들은 그들이 제조한 제품들을 좀 더 

사실적으로 시각을 이용해 구매력을 끌어내는 길은 극장의 휴게시간광고로만 가능했다. 이 극장휴게시간을 이용한 방식은 매우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이것을 창안한 사람은 

김사장(이름미상)으로 신영기업사라고 불린 광고 에이전트였다. 신영기업사는 전국에 극장주와 계약을 맺고 이 기업사를 통해서만이 휴게시간을 이용한 광고를 할 수 있게 

독차지 하는 식이었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휴전이 된지 4~5년에 지나지 않아 여러 생필품생산회사들이 생산해 놓은 상품광고나 회사의 기업광고가 절실할 때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등장한 광고는 활명수 소화제, 감기약, 피로회복용 강장제 드링크, 진로 소주 등 주류, 조미료, 세제 등 필수품 광고들이었으며 그리고 그 지역광고였다.  영화관이 35미리 

영화필름을 돌리는 영사기만 있었기 때문에 광고필름 역시 35미리로 제작해야 했다. 최초 광고필름(OB시날코, 1956)’을 만든 사람은 문달부라는 시날코회사의 직원이었다. 

그리고 엄도식이 그린 ‘활명수(1958년)’는 흑백으로 그림을 그려 촬영해 최초의 한국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어 “아이쿠 배야! 아이쿠 배야!” 라는 멘트를 넣어 관객을 매우 

웃겼다. 신동헌은 ‘원기소(1959)’와 ‘진로소주(1960’를 만들었다. 만화 주인공 ‘갈비씨’의 이상호와 신능파가 그린 ‘칠성사이다 · 스페시콜라(1959)’, 그리고 한성학 등이 광고 

애니메이션을 만든 최초의 애니메이터 들이었다. 

    광고 에이전트들은 애니메이션으로 광고를 주문받아 그 회사의 기업광고나 상품광고를 만화로 그려 제작을 했는데 제작비는 1분 길이를 약 20만 원 정도를 받았다. 당시에는 이것을 낫 설은 애니메이션이라 부르지 않고 만화영화광고라 불렀다. 625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많은 신생회사들이 주로 생활필수품이나 기업체를 광고하자면 극장에서 

상영하는 필름광고가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렇게 아주 열약한 조건에서 애니메이션이 시작되었는데 만화로 그려 35미리 필름으로 1분에서 긴 것은 2분짜리로 종류로는 약 

광고가 많았지만 청량음료, 주류, 조미료, 화장품 등이 주종으로 제작되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텔레비전 방송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전쟁이 휴전된 직후라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아주 단조로운 세상이었다. 

    수복 이후 서울에 흑백 TV방송국이 생겼으나 건물화재로 모두 타 버리고 국내 TV방송은 오랫동안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TV 시청은 Channel-2, AFKN(지금의 AFN미군방송)에서 한정된 시간으로 보내주는 미국말 TV방송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방송을 꼭 시청해야 했다.  이 방송은 토요일 마다 미국에서 제작된 오래된 단편 만화영화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VCR로 녹화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보는 동안 많이 느끼고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기를 바라며 보고 아쉬워했다. 

    여하튼 우리가 만들어주는 광고의 대부분은 극장과 계약한 대행 업자를 통해 극장 휴게시간 동안에 서울이나 지방극장에서 상품광고를 했다. 

    나는 광고만화영화제작소를 개업하고 너무 일이 많아 약 3~4년을 잠도 못 자며 일할 정도로 바빴다. 제작비로 고작 1분용 35mm 필름 제작으로 받은 돈은 분당 20만원 정도

였다. 제작을 신속히 하기 위해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 일을 공동으로 해야 했는데 그래도 모두들 매일 날밤을 새며 일을 해야 했다. 하나가 끝나면 그 다음 작품으로 또 밤을 

새야 했다. 이렇게 바빠도 제작비가 너무 적어서 직원들을 먹여 살리려면 또 빚을 얻어야 했고 이런 일은 매번 반복해서  똑같은 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신능파동화제작소‘라는 타이틀을 붙여 명함을 찍어 충무로 바닥에서 애니메이션으로 광고제작을 한다며 누비고 다닌 지 4~5년이 되니까 애니메이션 광고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 있는 광고대행회사들을 찾아 봤지만 만화영화광고를 하겠다는 기업회사들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지게 되었다. 애니메이션으로 광고를 하는 

것도 하나의 유행과 같아서 그 일이 없으면 아무거나 해서 밥을 먹고 살아야하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고민 끝에 실사로 광고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광고 대행사를 방문하여 아이디어를 짜서 그림으로 실사콘티를 그려 주었다. 내 아이디어는 반응이 좋았다. 그러나 그 일들은 좋은 아이디어를 남발할 뿐이지 돈벌이는 되지 

않았다. 나는 광고대행사들을 제치고 최초의 실사광고 감독으로 나섰다. 

    직접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나에게도 실사 광고 주문이 들어왔다. 노량진에 있는 ‘유한양행’이라는 제약회사였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무슨 강장제 약 광고였든 듯하다. 

콘티에는 기차가 카메라 위로 힘차게 지나가는 그런 내용으로 극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박력이 있는 장면이 연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동안 애니메이션 촬영할 때 알게 된 국립영화제작소를 찾아가 ‘35mm 아이모’ 카메라를 하나 빌리고 사용방법을 들었다. 카메라는 손으로 태엽을 감아 사용해야하는 

특수 카메라를 선택했는데 이 카메라는 100자 길이의 필름 밖에는 들어가지 않는 소형이다. 1분간의 길이다. 이번 광고에 몇 초 밖에 사용되지 않으니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경부 상행선 안양 근처로 현장을 택했다. 기차는 안양역을 서지 않고 지나가는 급행열차라서 선로 위에서 사람이 무엇인가 장치를 해놓은 것을 눈으로 보이게 되면 

멈춰 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관사가 나를 멀리서부터 볼 수 없는 약간의 커브가 있는 지점을 택했다. 또한 기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 때문에 카메라의 각도를 잘 

맞추어 자리 잡고 기차가 뱃바닥을 보이며 달려들듯 지나가게 찍는 것이 목적이다. 카메라의 셔터가 돌아가며 혼자 찍고 있는 동안 기차는 힘차게 카메라 위를 스치며 지나갈 

것이고 이것 중 필요한 부분을 잘라내어 쓰면 될 것 같았다. 기제를 싣기 위해 대한뉴스 차량을 빌려서 안양으로 내려가는 동안 나의 기대는 크게 만족스러웠다. 내가 평소에 잘 아는 곳이기 때문이다. 순서는 이러했다. 로케장소로는 안양역을 조금 지나면 다리를 넘어 경부선 철로가 오른쪽으로 보이는데 바로 그곳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철로는 약간 커브 길이어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촬영계획과 꼭 마자 떨어진다고 여겼다. 나는 기찻길 침목 옆의 돌을 들어내고 오목하게 자리를 잡고 카메라의 각도를 잘 잡았다. 

    나는 힘찬 박력 감을 상상하면서 세밀한 준비를 마치고 기차가 이곳을 통과할 때를 기다렸다가 정확한 순간에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뛰어 나와야 하는 것이었다. 이럴 때 카메라를 손으로 셔터를 작동해야 하기 때문에 기차가 달려들기 전에 나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계획이다. 카메라 조수는 기차가 코너에서 질주해 올 때 나는 보이지 않지만 조수가 내게 손짓을 정확한 시각에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기차는 안양역을 향해 폭음을 내며 무섭게 지나치는 급행열차였다.                                                     

    우리는 각자 자리에 서서 시계를 들여다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드디어 건너편의 조수로부터 기차가 오고 있다는 손짓이 왔다. 나는 급히 서둘러 기찻길 위에 올랐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셔터를 누르고 돌아서며 보니, 아~ 기차는 아주 가까운 곳까지 달려오고 있었다.

    이것은 사고 직전의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기차는 쇠끼리 미끄러지는 소리를 내며 급정거를 시도하고 있었다. 

    너무 급한 상황에 기차는 급정거를 했고 서 있는 기차에서 사람들이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기관사도 뛰어 내려와 

나에게 무서운 표정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는 질린 얼굴색이었다.  그리고는 크게 화를 내며 고함을 쳤다. 

    내 나이는 이때 30이었다. “당신 죽으려고 환장했어?! 뭐하는 거야?” 사실 이 당시에는 젊은 사람들도 세상을 비관하여 자살하려는 사람들도 많을 때였다. 기관사는 곧 나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갈 기세였다. 나는 다급한 나머지 손으로 길가에 세워 둔 자동차를 가리키며 뒷걸음질 쳤다. 운전수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고 그 차 

꼭대기에는 ‘대한뉴스’라는 타이틀이 얹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관사는 그것을 보고서야 이 사람들이 뉴스로 기차를 찍기 위해 나온 사람으로 이해를 하고, “이 다음 촬영하려면 미리 뒤의 역에 연락하면 서지 않고 멋지게 달려 주겠소!” 하고는 떠났다. 기차 창문마다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기차가 지나간 뒤 카메라를 주워 들고 십년감수한 듯 했다. 물론 필름은 쓸데없는 것만 찍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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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찍지 못한 이 장면을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다가 아주 좋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주 짧은 철교를 하나 발견했다.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 

였다. 나는 철교가 시작되는 콘크리트 부분의 위로 올라가 철교의 침목 사이로 카메라를 올려 밀고 지나가는 기차 밑을 찍기로 계획을 세웠다. 철교 교각 밑에 서서 손을 

올려보니 생각보다 내 키로는 어림도 없었다. 나는 돌과 벽돌 깨진 것을 모아 그 위에 올라서고 연습을 해 봤다. 잘만 하면 이번엔 실패 없이 무난히 내가 원하는 장면을 찍을 수 

있을 것으로 자신이 들었다.  나는 카메라 조수에게 단단히 일렀다. 

    카메라가 교각 밑에서 너무 빨리 나오면 기차가 또 급정거를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실수 없이 촬영할 수 있도록 연습을 거듭해 보았다. 이 두 번째의 

시도는 확실할 것 같았다. 이번에 기차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반대쪽이었다. 배경으로 본다면 기찻길 양쪽으로 시설물이 있고 멀리는 안양역이 보인다. 실패한 첫 번째는 

배경이 자연 풍경만 있는 멋진 풍경이었다. 그러나 지금 두 번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발밑에 밟고 있는 돌이 뒤뚱거리며 불안한 느낌이다. 그러나 잠깐이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관사는 내가 교각 밑에 있는 것을 알 수도 없고 나는 카메라의 각도만 손으로 잘 잡고 올려 밀면 되는 게 아닌가! 저 멀리 서 있는 조수는 기차가 온다고 사인을 

했다. 그러고는 팔을 급히 내렸다. 나보고 카메라를 이때 올리라는 급한 신호이다. 교각 밑에 나는 까치발을 하고 카메라를 쳐드는 순간이었다.  

    쾅! 하며 거대한 기차가 밀어내는 바람의 힘에 밀려서 교각 밑으로 곤두박질하며 거꾸로 쳐 박혔다. 내 눈에는 철교 밑에 얇게 깔린 시궁창물이 순간적으로 들어왔다.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더러운 흙탕물에 처박혀 엎어져 있었고 카메라도 어망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들어 올려 보니 카메라의 후드가 엉망이 되어 있다. 렌즈는 

이상이 없는 듯 보였다. 카메라를 물로 잘 씻었다. 나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촬영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날은 내가 시작한 최초의 실사 카메라맨으로서 가혹한 

Lesson을 받으며 입문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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